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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Critics

 



실로암 못가에서 163x130cm Mixed Media on Canvas 1994 20,000,000원

기억풍경-유년의 뜰(1) 130×163cm Mixed Media on Canvas 1995 20,000,000원


● 잊혀져 가는 그리움의 표현

글:  윤남수 (스모스갤러리 관장)

현대의 기계문명은 인간의 심성을 더욱 메마르게 하고 있다. 똑 같은 모양의 아파트 속에서 공동으로 보내어 지는 텔레비전의 전파를 수신하며 누구나 함직한 생각을 하며 생활하고 있다. 나라는 존재의 의미는 이미 사라져 버리고 누구도 똑같은. 복제되고 틀에 박힌 일상 만이 있을 뿐이다. 나의 정체성은 무엇일까? 현대인이라면 한번쯤 되물어 보는 물음이다. 이제 일상의 틀에서 한 걸음 달려나와 마음의 눈으로 주변을 살펴보자. 그 곳에는 내가 항상 그리워하며 꿈꾸어 왔던 아름다움이 펼쳐져 있을 것이다. 이번에 발표되는 이도선작가의 작품들은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잊혀져 가는 아름다움을 일깨워 주고 있다. 검정으로 처리된 화면과 그 속에서 밝게 빛나는 색채, 아련히 멀어지는 수평선, 기다리는 사람, 끝없이 이어지는 길 등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잊혀 졌던 어린 시절의 아련한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비구상으로 처리된 화면이지만 작품 속에는 그리움과 애틋함으로 바라보게 되는 구상성이 내재되어 있다. 대부분의 비구상회화가 대중에게 어렵게 느껴지고 , 친근감이 결여되어 있으나 이도선작가의 작품은 이런 면에서 우리에게 더욱 친근한 감동을 전해 주고 있다. 혹자는 ‘실험적이고 시대적인 흐름이 작품에 표출되어야만 한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좋은 작품이란 세월을 두고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전해 주어야 하고 사랑 받는 작품이어야 한다. 이도선 작가의 작품을 보면 그 속에 현대인들의 거친 감성을 푸근히 감싸줄 정감이 깃들어 있음을 느낀다. 풀무에 담궈진 쇠가 빛을 내어 더욱 단단해지듯 창작의 고통 속에서 발전이 거듭되기를 빌며, 이도선의 작품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잊혀 졌던 자신의 마음을 되돌아 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마음의 풍경-십자가 책형 163×130cm Mixed Media on Canvas 1997
(판매완료)

마음 속의 풍경-그리움45×64.5cm Mixed Media on Canvas 1997 (판매완료)


● 기억 저편의 그리움, 유년의 뜰

글: 김설류 (Gallery guide 기자)

작가 이도선의 작업 근저를 이루는 요소는 작가의 노트에서 풀어 놓고 있듯이 유년시절에 대한 기억과 추억의 매개체 , 즉 어린 시절 자라던 풍경이다. 작품 제목 ‘마음 속의 풍경’이라는 일관된 타이틀 안에서 유년의 잔상들을 기억화 하여 부제로 달고 있다. 유년 시절의 푸근한 기억들, 그 속에서 기억되는 자연과 사물은 내용적으로도 그의 작품이 따뜻하며 정겨운 이미지로 다가오게 만든다. 아니 제목을 배제하고 보더라도 그의 화면에는 조형적으로 정겨운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현대미술은 사람들에게 낯설고 난해 하여 좀처럼 접근하기 어려운 것으로 받아 들여 지고 있다. 특히 그 실체를 이해할 수 없어 보는 이에게 답답함을 안겨 주기도 한다. 자칫 난해함으로 이해되곤 하는 이러한 비구상 회화의 약점이 그의 화면에서는 보완되어 있다.적절한 해석과 표현, 그리고 적절한 구상성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야 말로 그의 작품이 가지고 있는 소탈한 매력이다. 그의 작품에는 구상과 추상이 동등한 수준에서 나타나며, 이러한 회화적인 요소를 초월하여 구상과 추상, 이 모두가 자연스럽게 수용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점은 그의 작품의 형식적인 특징이기도 할 것이다.감성이 본질을 이루어 형태화된 묘사는 그의 그림을 보다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동시에 작가의 의도가 계산되지 않은 무의식으로부터 출발된 주제임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2회 개인전 때 서술한 작업 일지에서도 알 수 있다. ‘의도된 형태와 계산된 작업은 나에게 흥미를 잃게 하고 실망과 권태만 줄 뿐이다.’ 어린 시절의 단편적인 추억들, 순수하고 맑은 유년 시절, 유년을 더욱 풍요롭게 하였던 정겨운 주변의 사물과 자연, 그 모든 유년의 풍경을 찾아 작가 이도선은 앞으로도 여행을 하며 유년의 기억 이곳 저곳을 찾는 작업을 지속할 것이다.



The Message of David's Life 65×100cm Mixed Media on Canvas 2021 10,000,000원


● 추상 속의 구상

글 :  최신영(시인)

-이도선 작가의 작품을 보고

이도선 작가는 오래전에 같은 직장에서 근무하며 교육에 대한 열정을 함께 했었다. 학교교육현장에서 늘 거시적인 안목으로 계획을 하고 다 함께 동참하도록 이끌어 주신 분이다. 평소 유연한 모습과는 달리 계획을 실행 할 때는 망설임이 없이 추진해 나가셨다. 교사들이 즐겁게 목표를 알고 일할 수 있도록 이해해주시고, 문제가 있는지 늘 귀를 기울이셨다. 가족과 같은 분위기에서 근무했던 행복한 때였다.
작가는 초등학교 때부터 가졌던 화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 1979년부터 화가의 길을 묵묵히 걸어왔다고 한다. 학교에서 방학이 되면 작업에 몰두하며 다양한 공모전에 참여하였고, 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지 7년이나 방황하다가, 1986년에 창작미술협회 공모전에 처음 입선하면서 본격적인 화가의 꿈을 향한 발걸음을 내 딛었다고 한다. 그동안 다양한 그룹전과 개인전에 200여 차례 참여하며, 화가의 길고 긴 여정을 걸어 온 것이 이제 사십 년이 넘어간다. 그 긴 세월 동안, 힘든 기색 없이 늘 밝은 웃음으로 직장과 작가의 활동을 동시에 하면서 모태신앙의 결정체인 목회자의 길까지 다져왔다고 하니 작가의 열정과 그 여정이 놀랍기만 하다.
나는 그림에 대해 잘 모른다. 그림을 보고 또 보며 작가의 표현 의도를 알아내려고 애쓸 뿐이다. 작가의 홈페이지에서 연도별로 정리된 작품을 보니 초기에는 구상과 비구상을 다 해보면서 자신의 표현법을 찾아가는 듯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비구상쪽으로 이동해간 작품이 점점 많아졌다. 유기적인 비정형적인 추상작품들이었다. 작품들은 또 다른 표현으로 변하여갔다. 직선과 개성있는 색채를 표현하는 추상적인 작품으로 변하여 바뀌어 갔다.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하며 변화를 추구한 결과인 것이다.
2,000년대에 그린 ‘마음속의 풍경’ 시리즈는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양평 시골의 모습을 그린 듯 편안하다. 자연 속에서 느끼는 감동을 그대로 보여 준다. 다양한 녹색들이 자신의 존재를 조용히 말하는 산과 들, 길, 나무들을 대신한다. 추상화가 어렵다고 하지만 작가의 그림은 이해의 여지를 남겨두어 고맙다. 거실에 걸어놓고 오래도록 보고 싶은 그림이다.
은퇴한 후 어느 교회에서 목회 일을 한다는 소문을 듣고 나는 ‘역시’ 하면서 당연하게 느껴졌다. 왜 당연하게 느껴졌을까? 늘 배려하고 인자한 모습을 봐왔기에 그렇다. 또한 편안한 목소리와 말투로 말씀하시는 모습이 상상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니었다. 어느 날 전시회를 하신다고 해서 가서 본 작품을 보고 알 수 있었다. ‘마음속의 풍경’ 시리즈에서 어떤 주제로 넘어갈지 궁금했던 게 다 풀렸다. 발표하시는 작품 속에 신앙을 꾹꾹 다져 넣고 있었다. 한 땀 한 땀 바느질하듯이 붓질을 하며 예수의 발걸음을 그려 넣었다.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의 발걸음과 마을과 바다가 살아 있었다.
최근의 작품들을 본다. 작가의 글도 읽어 보며 예전에 읽었던 성경 장면을 생각하면서 그림을 본다. 성경을 모르면 어떤가. 그림은 그 자체로 내게 다가온다. 단색으로 그리는 화가도 있지만 몇 가지의 다양한 색상이 만나서 넓은 공간을 차지하는 그림도 있다. 어떤 색상으로 했느냐, 어떤 색상을 많이 썼느냐에 따라 느낌이 달라지니까. 색들이 만나서 온몸으로 달려오는 느낌이 좋으면 내게는 좋은 그림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도선 작가의 그림은 편안하고 명상에 잠기게 하는 좋은 그림으로 내게 다가왔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의 삶에서 만나는 메시지를 담을 때도 그런 것 같다.
크고 작은 다각형의 공간에 색을 입힌 작업! ‘예수 수난의 길’이라는 작품에서 처음으로 느끼는 내 반응이다. ‘그런데 다각형 안에 작은 네모나 거칠은 탑 같은 것은 무얼 그린 걸까?’ 하는 의문도 해본다. 그 작은 것들이 없다면 다른 다각형들이 의미를 잃을 것 같다. 성경을 알고 나면 좀 이해가 될 것 같다.
거친 다각형이 골고다의 언덕으로, 작은 네모가 창문이거나 마음의 문으로, 나머지 표현들이 마을 사람들과 예수와 제자들로 다가왔다. 붉은 색이 고난의 피로 연상된다. 예수의 수난으로 인해 구원을 얻었다는 교리에서 온 것일까? 붉은 빛이 많이 들어간 그림이다. 작가는 이 그림을 그리면서 성경 구절과 장면을 생각하며 수없이 많은 날을 고뇌했을 것이다.
갈릴리바다를 그린 그림은 푸른 바다 빛이 많이 들어갔다. 아무 생각 없이 봐도 바다와 하늘과 배와 마을과 사람이 있는 풍경이다. 추상적이기는 하지만 바다를 노 저어 가는 제자와 바닷가에서 제자를 낚으시는 예수의 말씀까지도 그려 넣지 않았나 싶다.
나는 바다 빛이 많이 들어간 갈릴리바다 주제의 작품이 보는 데 편한 마음이 든다. 폭풍이 몰아치는 바다였다가 잔잔한 바다였다가 하는 바다는 우리가 사는 현실세계와 닮았다. 바람을 이겨내고 앞으로 나아가느라 힘들어 지칠 때가 있기도 하지만 조개 하나를 줍고도 행복해 할 때도 있다. 우리는 모두 잔잔한 바다를 꿈꾼다.
갈릴리바다 작품에서 보이는 바다는 늘 평화롭고 행복하다. 우리가 잔잔한 바다 같은 세상에서 평화롭게 살고 싶듯 작가도 그런 뜻을 담았으리라 생각한다. 영원한 평안에 이르는 길을 그림을 통해 알려주고 싶을 뿐인 것 같다.
가버나움이라는 작품도 마찬가지로 다양한 다각형과 사실적 표현으로 작품은 이해하기 쉬워서 좋다. 가보지 못한 갈릴리바다와 주변 도시에는 예수의 흔적이 묻혀있을 것이다. 그림을 보면 오랜 시간 묻혀온 이야기들을 찾아 나서고 싶게 만든다. 사람들을 놀라게 한 기적도 보고 싶게 한다.
표현하기 어려운 주제를 개성 있는 화법으로 정진해온 이도선 작가의 보이지 않는 땀방울에 무한 가치를 둔다. 앞으로도 이도선 작가가 높은 신앙의 수준에서 더 좋은 작품으로 우리에게 굳은 믿음의 모습을 보여 주기를 원한다.



이도선의 삶과 그림

글 : 김홍균 (시인)

들어가기


화가를 꿈꾸는 사람은 누구나 어렸을 적부터 마음에 드는 그림을 대하면 가슴이 뛰었던 기억 하나쯤은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예술은 싫어도 참고 노력하여 성적을 올릴 수 있는 공부와 다르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스스로도 주체할 수 없이 그리고자 하는 욕구가 분출되는 사람만이 화가의 길을 선택한다.
그러한 욕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 화가가 되는 것도 물론 아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생업을 이유로 화가에의 간절한 꿈을 가슴속에 묻어둔 채 살고 있을까?
화가 이도선은 교사의 길을 걸으며 화가의 꿈을 실현한 사람이다.
생업에 종사하면서 취미 삼아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많다. 교사들도 마찬가지다. 그림을 그린다면 화가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그러나 냉정하게 말해서 그런 사람들 중에 진정한 화가라고 불리울 만한 사람은 또 얼마나 될까?
이도선은 교사이면서도 “화가”라고 불려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만큼 많은 작품활동을 해왔고 지금도 하고 있다. 당연히 “화가”라고 불릴 만큼 작품의 수준도 높다. 이러한 평가를 받을 만큼 치열한 삶을 살아왔다.
화가를 꿈꾸었기에 상대적으로 교사의 역할에는 소홀했을까?
그는 서울교육대학교부설초등학교에서 5년을 근무했다. 한 과목의 이론과 수업에 권위 있는 교사들이 서울의 모든 교사들 중에서 선발되어 근무하는 곳이 그 학교이다. 군대를 뺨칠 정도로 엄격한 규율과 연구교사로서의 노력을 요구하는 학교이다.
또한 그는 서울미술교과연구회에서 수십 년간 중추적 역할을 해왔다.
미술교육의 발전에 뜻을 둔 서울 교사들의 모임인 서울초등미술교과연구회는 교사들을 상대로 미술 수업에 대한 연수를 주로 하며 아동들의 그림전을 추진하기도 한다.
이 연구회의 회원으로 회장으로 그리고 고문으로 그는 항상 연구회의 중심에 있었다.
그러면서 화가를 꿈꾸며 그림을 그렸다.
그런 그의 삶과 예술 세계를 알아보는 것은 뜻 있는 일이다.

구상의 시기 - 화가를 꿈꾸며


화가라는 이름은 자격증에 의해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림의 질이 학력에 좌우되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미술대학이 있어 화가 지망생들은 이곳에서 자신이 걷고자 하는 화가의 길을 모색한다. 물론 미대를 졸업한다고 해서 모두 화가의 길을 걷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미대를 나온다고 해서 화가라는 자격증을 주는 것도 아니지만 또한 미대를 졸업한 사람의 그림을 무조건 더 높게 평가해 주는 것도 아니지만 화가의 꿈을 지니고도 미대에 진학하지 못한 사람들의 가슴 한구석엔 어쩔 수 없는 아쉬움이 한처럼 자리 잡고 있다. 그 아쉬움을 메우기 위해 여가를 활용하여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도 많다.
그런데 단순한 여가 활용이 아닌 진정한 화가를 꿈꾼다면, 그때는 마찬가지로 단순한 노력을 넘어선 치열한 삶의 자세가 요구된다. 생업을 위한 근무 시간 외의 모든 시간을 쏟아 부어도 진정한 화가라는 이름을 얻기란 결코 쉽지가 않다.
이도선의 초기 그림은 어쩌면 대부분의 화가 지망생들이 그러하듯 구상 계열이었다.
인물을 대상으로 사실적인 그림으로 출발한다.
지금 보아도 그의 초기 인물을 대상으로 한 그림들은 별로 흠잡을 데가 없어 보인다. 이 말은 사실은 별로 독특하지 않고 평범하다는 말의 다른 표현일 수도 있다.
이렇게 그의 그림을 평가하는 것은 그가 초기에 그린 사실적 그림으로 여러 번 공모전에 응모했으나 낙방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는 공모전에 입상한 작품이나 낙방한 작품들의 질적 차이를 잘 느끼지 못한다. 다만 나의 취향에 맞는 그림을 골라 볼 뿐이다. 그래서 이도선의 초기 사실적인 그림들은 입선이나 낙방의 어느 쪽에 있다 해도 별로 이상할 것 없다는 생각을 해본다.
다만 내 취향에는 맞는 그림이다.
그렸다 지웠다 를 반복하다가 우연히 얻어진 실루엣에 간단한 가필로 얻어졌다는 작품 < 여인상 >에는 아름답고 온화한 분위기 뒤에 진한 고뇌의 흔적도 함께 묻어있다.
작품 < 가족 >에는 사랑이 가득하다. 부모의 품에 안긴 아이들의 모습이 얼마나 행복했으면 부인의 요청에 따라 자신의 거실에 걸어놓았을까?
작품 < 나락 >은 제목처럼 추락하는 인간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려 놓았다.
이 작품도 공모전에서 낙방했을 것인데 제목 때문일까 하는 엉뚱한 생각도 해본다.
하기야 사실적 구상 계열의 그림이 공모전에 입상했더라면 오늘의 화가 이도선은 전혀 다른 그림을 그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초기 비구상 – 자신만의 세계를 찾아서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조적인 것이다.”
영화 < 기생충 >으로 오스카감독상을 수상한 봉준호 감독이 인용한 말이다.
“당신 자신을 그대로 드러낸다면 그게 바로 독창성이다. 왜냐하면 당신과 똑같은 사람은 없으니까.”
디자이너 마크 뉴슨(Marc Newson)의 말이다.
어쩌면 이미 진부한 말들이다. 모든 예술가들은 자신만의 독창적인 세계를 창조하고자 자신의 모든 것을 건다. 독창적이지 못한 사람은 예술가가 아니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이도선 역시 예외가 아니다.
그는 사실적 그림이 공모전에 낙방한 것에 대해 실망도 했겠지만 한편으로 다른 사람들과 구분되지 않는 자신의 표현 방법 때문이라는 인식을 했을 것이다.
그런 인식을 바탕으로 그는 표현 방법을 완전히 바꾸어버린다.
구상에서 비구상으로.
비구상의 영역에는 나만의 세계가 있을 것인가?
캔버스에 한지를 덧대어 붙이고 거기에 유화 물감으로 채색을 시도한 것 또한 자신만의 표현 방법을 찾아내려는 몸무림 이었으리라.
그리고 그토록 치열했던 그의 노력에 대한 응답은 운명처럼 찾아온다.
비구상 계열의 창작미술협회 공모전에서 작품 < 도시 풍경 >으로 금상을 거머쥔 것이다.
어느 예술 세계든 또는 현실의 어떤 분야든 마찬가지겠지만 미술계 역시 각종 공모전에서 인맥이 작용하기도 한다. 이것은 순전히 나의 주관적인 생각이다. 세상이 그렇지 않다면 이 말에 대해 나를 비난해도 좋다.
응모작의 수준이 차이가 남에도 자신과 인연 있는 사람들의 작품을 우선 뽑아준다면 이는 비열한 행위이다. 그러나 응모작들의 수준이 정말로 비슷비슷하다면 어찌할 것인가? 어느 심사위원인들 자신의 제자들 쪽으로 손이 굽지 않겠으며 그것을 비난만 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대상”에 해당되는 작품은 선정되지 않은 그 공모전에서 아웃사이더(?)로 참가한 이도선이 “차상” 다음의 “금상”을 수상한 것은 그의 말마따나 행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런 연고도 없는 공모전에 응모한 그의 작품이 그런 평가를 받는 것을 어찌 행운으로만 치부할 노릇인가? 더구나 그의 작품은 주최 측에서 제시한 응모 작품의 규격에도 벗어나 있어 설령 낙방이 된다 한들 아무런 이의도 제기할 수도 없던 상황이었다고 한다.
긴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그는 이 작품으로 화가로서의 실력을 인정받았으며 오랜 노력 끝에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을 찾은 것이다. 비로소 자신만의 세계를 찾은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그의 비구상 초기 작품들은 화면을 다양한 사각형으로 구분하여 갈색 톤으로 채워 넣는 그림이 대부분이다.
그 사각형들은 단조롭다고도 할 수 있겠고 중후하다고도 할 수 있을 그런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그 그림들을 좀 더 자세히 뜯어보면 세세하게 덧칠한 붓자국들이 독특한 마티에르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온 화면을 덮고 있는 촘촘한 그 붓자국들은 화가 이도선이 쏟아 부은 시간과 땀으로 만들어진 것들이다.

마음속의 풍경 – 가슴을 적시는 유년의 기억들


세월이 흐르면서 화가 이도선의 캔버스에는 잘게 쪼개지는 아기자기한 면들이 나타난다.
비슷한 크기로 조금은 단조롭게 분할되던 화면이 커다랗게 구분되고 그 사이사이에 올망졸망 모여 있는 작은 면들은 작가의 가슴속에 언제나 파릇하게 남아 있는 추억들 - 이름하여 < 마음속의 풍경 > 시리즈는 그가 유년시절을 보낸 뚝방촌의 이야기란다. 그 시절 작고도 가슴 따뜻한 이야기들이 작은 면의 모습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는 것일까?
굳이 뚝방촌이란 배경 설명을 듣지 않더라도 그 그림들은 보기만 해도 정겹다. 전기의 작품들에 비해 밝아진 색체는 더욱 따뜻한 느낌으로 가슴을 적신다.
그가 < 마음속의 풍경 > 시리즈를 제작한 것은 이른바 “지식정보화 시대”하고 불리던 바야흐로 컴퓨터가 세상을 지배하기 시작하는 그런 시기였다.
농경사회에 태어난 그와 우리들의 유년은 기계문명에 매몰되어가는 이 시대에 메마른 삶을 촉촉이 축여주는 생명수와 같은 기억으로 다가오곤 한다.
그 기억을 담은 그림 - 마음속의 풍경들을 뚝방촌에 한정시키는 것이 오히려 오류일 것이다. 이 살벌한 문명 이전에 사람끼리 부대끼며 세상을 살았던 사람들은 설령 미술을 잘 알지 못할지라도 이 작품들에서 그 시절의 따스했던 인정들을 충분히 느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문명이 발전하면서 잃어버린 것들 - 기계 냄새에 묻혀버린 사람 냄새를 이 시리즈에서 나는 발견하곤 한다.


“이거 구상 아니야?”
여느 때처럼 그의 개인전을 관람하던 내가 물었다.
시리즈 < 마음속의 풍경 >이 반복되던 어느 시점이었을까? 지금까지의 색채와 면 분할과는 아주 많이 다른 작품이 걸려 있었다.
마치 드론에서 촬영한 듯 한 들판의 풍경 같았다. 넓은 초록빛 들녘을 길로 분할한 그 그림들은 보는 사람에 따라 추상으로도 혹은 구상으로도 보일 법 했다.
“글쎄. 한 번 시도해 봤는데 그림이 되네.”
씩 웃으며 대답한다.
하기는 작품을 놓고 구상인지 비구상인지 굳이 따지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가?
이제 그는 또 다른 변화를 모색하는 것일까?

신앙의 빛 – 믿음의 길 위에서


이도선 목사.
퇴직 후 어느 날 그가 목회자의 길을 걷는다는 말을 들었을 때 조금은 뜻밖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십 년 지기라고 여겼건만 그토록 독실한 신앙인이라는 사실은 미처 몰랐었다.
일반적으로 목회자가 되면 개척교회를 운영하거나 부목사로서 교회 일을 맡기 마련인데 목회자로서 이도선은 그림을 통해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했다. 자신에게 주어진 달란트를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겠다는 말이다.
어디 이도선 목사 뿐이랴. 많은 목사들이 자신의 달란트 대로 대학 강단에서, 정치적인 무대에서 혹은 언론사에서 활동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을 생각하면 그림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겠다는 그의 생각 또한 특별하게 생각되지는 않는다. 김인중 신부님 또한 추상화가로서 멋진 작품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있지 않은가?
화가 이도선으로서, 목사 이도선으로서 자신의 종교에 대한 믿음을 담은 훌륭한 그림을 계속 제작하여 그의 인생 후반을 값있게 장식하기를 바라며 또한 믿는다.
요즘 작업하는 그의 그림을 보면 그림의 모습이 확 바뀌었다.
색채는 < 마음속의 풍경 >에 비하면 화려하다 할 만큼 다채로워졌다. 붉은 색조가 많이 눈에 띄는데 어쩐지 예수의 성의가 연상되는 것은 선입견일까?
면 분할 속에 사람의 모습이 역력하다. 누군가 추상 속의 구상이라고 말했는데 맞는 말이지만 앞서 언급했다시피 그러한 구분은 별 의미가 없다고 본다.
작품 < 마음속의 풍경 >이 유년시절의 추억들을 이미지화 했다면 신앙인 이도선이 작금에 그리고 있는 작품들은 성경속에 나오는 하나의 사실들에 초점을 맞추어 표현하고 있다. 구체적 사실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등장인물들이 표현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신앙심이 발현된 것일까? 그의 그림을 보면 빛이 나는 것 같다. 밝은 빛이 작품을 비추고 있는지 아니면 그림이 빛을 내뿜고 있는 것인지… 이런 작품들에 대한 예술적 분석이나 평가는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으나 그는 이 신앙적 작업에 의해서 이미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듯하다.

나가기


한 사람의 예술 세계를 놓고 왈가왈부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예술 세계가 그만큼 조명을 받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누구나 한 예술가의 작품을 평가할 수 있으며 각각의 평가는 다를 수 있으되 틀린 것은 없을 것이다.
교사로서 40년을 살고 남은 생을 목회자로서 살아가면서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구축해온 이도선의 삶과 작품을 옆에서 수십 년을 지켜 본 한 사람으로서 나름대로의 평을 적어 보았다.
치열한 그의 삶에 경의를 표하며 수준 높은 그의 예술에 박수를 보낸다. 그가 믿는 주님의 은총이 그의 생에 가득하기를 기원한다.